이책은
닮게 그린다는 것 - “터럭 한 올이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은 화가에게 요구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누구라도 주인공을 단번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닮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나라 유학자 정이(程?)의 “터럭 하나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었다. 이에 따라 화가들은 주....+전체보기인공의 모습을 더 닮게 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회화 기법상의 큰 진전을 이루었다. 저자는 1700년을 전후하여 초상화 표현 기법에 일대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김진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만중 초상〉(1600년대 말)과 〈김진규 초상〉(1710년대)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리는 쪽으로만 초상화 기법이 발전해 나가지만은 않았다. 김진여가 그린 〈권상하 초상〉(1719)은 서양의 명암법이 잘 반영되어 있어 사실적 재현 솜씨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보다 후에 그려진 진재해의 〈유수 초상〉(1726)은 서양화법을 반영하지 않고 따뜻한 질감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권상하 초상〉은 사실적이기는 하나 어둡게 그려진 반면, 〈유수 초상〉은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재현되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 얼굴의 주름이나 잡티가 드러나지 않기를 원해서 사진을 보정하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도 사실적인 그림만을 지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장된 묘사로 내면을 드러내다 - 〈송시열 초상〉, 〈박세채 초상〉, 〈윤두서 자화상〉
외형 못지않게 내면 즉 주인공의 정신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중시되었는데, 이때는 주인공의 특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부각한 경우가 많았다. 얼굴 곳곳의 굵직하고 구불구불한 주름, 붉은색의 두꺼운 입술, 무성한 수염과 눈썹, 큰 몸체 등 매우 강렬한 인상의 인물로 보이게 하는 〈송시열 초상〉, 떡 벌어진 어깨, 넓은 팔소매 등 덩치가 매우 커 보이게 그려져서 그의 제자가 “높고 큰 산의 형상”이라 말한 〈박세채 초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한쪽 귀밑에서 다른쪽 귀밑까지 빙 둘러 나 있는 수염 한 올 한 올이 서로 얽히지 않고 가지런히 바깥쪽으로 뻗은 모습으로 그려진 〈윤두서 자화상〉을 두고, 저자는 “윤두서는 자신이 평생 쌓은 학문적·예술적 성취와 자신감의 근원을 자화상에 담아내고자 했으며, 자신의 머리(얼굴)에서 기가 발산되는 듯한 모습으로 수염을 표현함으로써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초상화는 곧 '주인공의 대체물’ - 〈안향 초상〉 도난, 훼손 사건
조선시대 사람들은 닮게 그려진 초상화를 주인공의 '대체물’로 인식했다. 1684년 소수서원에 도둑이 들어 그곳에 봉안돼 있던 〈안향 초상〉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둑은 〈안향 초상〉을 훼손한 뒤 고을의 성 서쪽 큰길가에 버렸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순흥부를 다시 설치하기로 함에 따라 여러 관공서의 신축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면서 많은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고, 이 때문에 지역 양반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우의정 남구만은 이러한 백성들의 원성을 안향 초상화 도난 및 훼손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안향의 초상화를 한낱 그를 재현한 '그림’으로 보지 않고 바로 '안향’ 자체로 보았고, 안향은 곧 양반 사대부의 대명사였으며, 그래서 안향의 초상화를 훼손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초상화 봉안의 정치학 - 추모를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힘
16세기 중반 이후 훈구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한 사림 세력은 선현을 기리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으며, 전국 각지에 서원을 건립해 나가면서 '초상화의 힘’에 주목했다. 초상화가 선현을 사모하고 기리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14년 소론계 유학자 강필효가 유봉영당(酉峯影堂)에서 윤증의 초상화를 보고 “마치, 그때 선사(先師) 앞에서 친히 말씀을 듣는 듯했다.”라고 한 것, 17세기를 대표하는 남인 유학자 장현광이 정몽주의 초상화를 첨배한 뒤 “거슬러 당시를 멀리 상상하니 구천(九泉)에서 다시 나오신 듯하네.”라고 한 것 등이 그 예로, 저자는 16세기 이후 초상화는 단순히 특정 인물을 재현한 그림이 아닌, 위패에 버금가는 봉안 대상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사당 봉안용 초상화 - 목민관과 백성들 간의 결탁의 산물
조선시대 초상화 중 상당수는 주인공이 화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추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다. 이 중에는 한 고을에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떠난 목민관을 기리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제작한 '생사당(生祠堂) 봉안용 초상화’라는 것이 있다. 생사당은 제향 대상 인물이 살아 있는데도 그를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을 말한다. 1595년경 평안감사 이원익을 위해 지역 백성들이 세운 생사당이 그 시발점으로 여겨지는데, 저자는 생사당의 유래 및 성행의 흐름을 평안감사 허적ㆍ이만원ㆍ홍만조, 평양서윤 성수웅 등의 초상화를 들면서 살핀다.
한편, 생사당 조성은 17세기 말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시기에 조정에서는 생사당의 무분별한 난립에 따른 폐단에 대해 거듭 논의했다. 즉 지방관들이 '양리(良吏)’라는 명예를 얻을 요량으로 세금을 무분별하게 경감하는 등 필요 이상의 은혜를 베풀고, 지역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생사당을 건립해 주었던 것이다. 영조는 1724년 이후 평안도에 건립된 관찰사의 송덕비(頌德碑)와 생사당을 모두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생사당 봉안용 초상화는 17~18세기에 출몰한 특수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제자들이 화가를 시켜 몰래 그린 스승의 초상화 - 〈윤증 초상〉
1711년 여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인류는 언제부터 초상화를 그렸을까
중국 초상화 제작의 초기 흐름
우리나라 초상화 제작의 시작
예술성 높은 조선시대 초상화
특정 인물의 재현, 그 이상의 의미
주인공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그림
1. 초상화란 무엇인가?
'닮음’을 추구한 그림 1: 외형의 닮음
닮게 그린다는 것, 〈이시백 초상〉
“터럭 하나라도 더 많....+전체보기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
〈장말손 초상〉과 〈이시방 초상〉의 차이
“어진(御眞)은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어야 합니다”
초상화 표현 기법의 큰 변화
'닮음’을 추구한 그림 2: 내면의 닮음
과장된 묘사, 〈송시열 초상〉과 〈윤두서 자화상〉
'정신’을 담다, 〈강세황 자화상〉과 〈서직수 초상〉
인자한 성품을 드러내다, 〈김정희 초상〉
'신명’이 깃든 그림
'신명’의 힘, 〈이제현 초상〉과 〈하연 초상〉
7년 만에 다시 그려진 〈채제공 초상〉
'나’의 대체물
2. 초상화의 힘
'환영’의 경험
“선생은 말이 없고, 제자는 눈물을 흘린다”
“구천(九泉)에서 나오신 듯하네”
초상화 봉안과 서원의 건립
소수서원의 〈안향 초상〉
임고서원과 숭양서원의 〈정몽주 초상〉
노동서원의 〈최충 초상〉과 오봉서원의 〈공자 초상〉
선현(先賢) 초상화의 힘
사당과 영당으로 옮겨 간 초상화
김시습영당, 청일사와 청절사
포은선생영당이 지어진 사연
초상화 봉안의 정치학
기념 공간에서 제향 공간으로
스승의 철학과 사상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이모본 초상화의 제작
이모본, 조선 후기 초상화 제작의 특징
〈안향 초상〉 이모에 들인 노력
〈안향 초상〉 재(再)이모 과정의 전말
봉안과 보존의 가치
3. 기억과 추모의 그림
어진 목민관을 기리다
살아 있는 목민관을 제사 지내다
명나라 장수들이 요구한 생사당과 초상화
생사당 조성 유행의 시초, 이원익 생사당
평양에 조성된 생사당과 그들의 초상화
지방 화가들이 그린 젊은 목민관의 초상
생사당 난립의 폐해와 철폐령
스승을 추모하다
평생 학문에 천착한 학자의 모습, 〈장현광 초상〉
노론의 영수(領袖), 〈송시열 초상〉
몰래 그린 스승, 〈윤증 초상〉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 초상〉과 〈윤봉구 초상〉
스승을 영원히 추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사랑하는 벗과 가족을 그리다
이서와 윤두서가 사랑한 벗, 〈심득경 초상〉
요절한 아들을 그린 아버지, 〈이산배 초상〉
86세 어머니를 그리다, 〈복천 오 부인 초상〉
아버지와 아들의 합작, 《칠분전신첩》
4. 성대(盛代)의 기록
공신에게 초상화를 하사하다
“공신의 형상을 그려 후세에 널리 알리라”
보사공신 김만기와 김석주
영조, 공신들의 초상화를 어람(御覽)하다
“분무공신들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라”
《권희학 충훈부 초상첩》과 〈박문수 초상〉
분무공신 초상화의 도상(圖像)과 표현 형식
나이 든 신하를 예우하다
300년 만에 성사된 왕의 기로소 입소, 《기해 기사계첩》
51세 영조의 기로소 입소, 《기사경회첩》
영조, 나이 든 신하의 초상화첩 제작을 정례화하다
별본으로 남은 기로소 신하의 초상 1 - 이산두와 이익정
별본으로 남은 기로소 신하의 초상 2 - 강세황과 구윤명
별본으로 남은 기로소 신하의 초상 3 - 김치인과 채제공
현신(賢臣)과 충신(忠臣)을 기억하다
숙종이 왕자에게 하사한 〈연잉군 초상〉
등준시(登俊試) 무과 합격자들의 초상화
정조, 근신(近臣)들의 초상화 제작을 수시로 지시하다
정조가 가장 총애한 채제공의 초상화
왕의 초상화 하사에 대한 신하들의 반응
《해동 진신 도상첩》과 《명현 화상첩》
관복본 초상화의 걸작, 〈유언호 초상〉과 〈오재순 초상〉
5. '나’를 표현한 그림
숙종 어진, 성군(聖君)의 현현(顯現)
초상화와 정체성의 표현
숙종, 화려한 '어진(御眞) 시대’를 열다
1713년 작 〈숙종 어진〉이 제작되기까지
완벽한 어진 제작을 위해 숙종이 온힘을 다한 이유
군복본 정조 어진, 지극한 효심의 표현
군복본 정조 어진의 실마리, 〈철종 어진〉과 〈이창운 초상〉
〈이창운 초상〉과 〈이삼 초상〉의 차이
군복본 정조 어진의 세부 요소 - 깍지, 등채, 환도, 통개
영원히 부모 곁에 남고자 - 육상궁 냉천정과 현륭원 재실
정조가 현륭원 행차 때마다 군복을 입은 이유
야복(野服)에 투영된 염원
'출사(出仕)’와 '은일(隱逸)’ 사이의 고뇌
탈속(脫俗)의 삶을 염원하다, 〈김진 초상〉
“몸뚱이는 공허한 것이고, 그림 또한 진짜가 아니다”
양겸과 죽서초당
은일의 삶을 갈구하다, 〈조정만 송하안식도〉
초상화 대신 그려 준 〈송계도〉, 신분 차별의 한이 담긴 〈검선도〉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의 의미
“도(道)도 선(禪)도 아니요, 은거한 것도 쫓겨난 것도 아니다”
“정자관을 쓰고 심의를 입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드러낸 그림, 자찬문(自贊文) 있는 초상화
상의하상(上衣下裳)과 난삼(?衫)
에필로그
부록 - 그 밖의 주요 초상화 14점
주(註)
인명 및 초상화 작품명 찾아보기
* 서지정보 입력인원이 지속적으로 상세가 부족한 도서에 대해서는 정보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 더 충실한 도서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