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예프넨은 걸음을 서둘렀다. 하인이 맡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직접 동생을 안아든 채 저택으로 내달렸다. 현관에 도착할 무렵 빗발이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층에 계십니다.”
블라도 삼촌이 탄 말이 들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진 동생을 내려놓으며 예프넨은 다시 물었다.
“튤크 집사는 내려왔나?”
“예.....+전체보기 벌써 연병장으로 나가셨습니다.”
예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볼 필요는 없겠지. 보리스, 방으로 가자.”
흙 묻은 신발을 갈아 신을 틈도 없었다. 말끔하게 닦아 놓은 마루와 잘 손질된 융단에 풀씨와 진흙이 뭉개졌다. 가로막는 문들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달려 들어간 예프넨은 침실에 이르자 홱 돌아서서 문을 닫고 단단히 잠갔다.
보리스는 침대에 주저앉았지만 예프넨은 곧장 장롱을 열고 잘 접어놓은 옷들을 마구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강철 경첩이 붙은 작은 상자가 발견되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뽑아 돌렸다. 뚜껑이 열리고 나온 것은 손가락 두 개만큼 굵고 시커먼 열쇠였다.
“보리스, 네 방에 가서 아버지가 주신 브리간딘(brigandine) 갑옷을 꺼내 입어라. 검과 장화를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말고. 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동생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훑는 것을 느꼈지만 무어라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일어나 예프넨의 방과 이어진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곧이어 뛰어 들어온 유모의 도움을 받아 무장을 마칠 즈음 예프넨의 급한 손길도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묵직한 장롱을 밀어내고 뒷벽에 붙인 위장용 나무판을 뜯어낸 다음 그 안쪽에 장치된 철 금고의 열쇠구멍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았다. 굵직한 열쇠를 꽂아 힘껏 돌리자 덜컹, 소리를 내며 경첩이 열렸다.
보리스가 돌아왔을 때, 난장판이 된 형의 침대 위에는 두 개의 신성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형제는 잠시 침묵했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스노우가드(Snowguard)…….”
은백색 사슬이 눈 결정을 모아 엮은 듯 눈부셨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황홀한 짜임이었다. 보리스는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갑다가… 따뜻해진다. 정말이었다. 열을 빨아들여 소멸시켜버린다는 신비로운 힘은 마력 깃든 갑옷 스노우가드의 수많은 힘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어떤 강한 불로도 녹일 수 없다는 눈의 갑옷, 네 세대 전 예프넨과 보리스의 증조부가 진네만 가문의 손에 넣은 보물이다.
예프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윈터러(Winterer).”
‘겨울을 지새는 자’라는 이름 그대로, 냉기로만 제련된다는 기이한 금속이 한 줄기 섬광처럼 벼려져 침묵하고 있었다. 검이다. 날씬한 자태만큼이나 귀족적인 싸늘함을 지닌 하얀 검이다. 검과 갑옷, 두 가지를 합쳐서 윈터바텀 킷이라고 불렀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윈터바텀 킷을 놓고 아들들이 싸우지 않기를 원해서 하나씩 나누어주고 서로 협력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블라도는 형인 율켄에게 내쫓겼고 당연히 소유권도 빼앗겼다. 이제 그것을 되찾으려는 마음에 추호도 망설임이 있을 리 없었다.
율켄 역시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윈터바텀 킷은 합쳐졌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나누는 것은 아무 좋은 점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가문을 이을 큰아들의 것이다. 열두 살인 보리스보다 예프넨은 여덟 살이나 많았다. 그 정도 나이 차이면 동생이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율켄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프넨의 생각은 또 달랐다.
“보리스. 검을 잠시 빌릴게.”
겨울의 검 윈터러는 그 정체 모를 재질 탓인지 그만한 크기의 검치고 가벼웠지만, 그래도 열두 살 어린아이가 휘두르기엔 벅찼다. 보리스는 가만히 형을 올려다보았다.
율켄이 윈터바텀 킷을 예프넨에게 넘겨 준 것은 올해 초, 예프넨이 스무 살이 되던 때였다. 그러나 그날 밤 예프넨은 자기 방으로 보리스를 불러 두 가지 물건을 보여주며 어느 쪽이 좋아 보이느냐고 물었다. 보리스는 별 생각 없이 무거운 갑옷보다는 검이 멋진 것 같다고 답했고, 그러자 예프넨은 네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걸 네게 주겠다고 했다. 깜짝 놀라는 보리스에게 부드럽게 웃으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리스는 자신이 그 말을 믿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후로도 형은 몇 번인가 기회가 닿을 때면 ‘윈터러는 네 거다’고 말해 주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도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 형은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보리스는 여전히 그 이름 높은 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형 거야.”
목차
1장. Bleeding
1. 늦여름의 늪
2. 눈의 갑옷, 겨울의 검
3. 쫓김
4. 다시 한 번 잃어버린
2장 · Parting
1. 첫 저녁 식사
2. 윈터러
3. 쓰디쓴 가르침
4. 용병단의 작은 소녀
5. 긴 자장가
3장 · Blinding
1. 로즈니스 아가씨
2. 삶의 갈림길
3. 아노마라....+전체보기드
4. 란즈미, 10세, 자폐아
5. 호두 선생
4장. Empathy
1. 달과 검, 그리고 사악한 밤
2. 대륙의 검사들
3. 엇갈림과 겹침
4. 타인들의 연회
5. 겨울나기
5장 . Cutaway
1. 그리고 봄이 왔다
2. 바람이 남긴 손자국
3. 스노우가드
4. 빛 없는 밤을 뚫고
6장 . Intensify
1. 첫 살해
2. 북방 선원의 나라, 렘므로 가며 겪은 세 가지 일들
3. 굴복하는 법, 치욕을 견디는 법
4. 호수 속 금빛 그림자
부록 . Appen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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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의 아이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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